The World of Sound - Chapter 138
Only Krnovel
138
산 아래 갇혀 있는 동안 두 사람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당초 천화가 그를 그곳에 붙잡아둔 이유 중 하나가 그를 통한 정보의 습득이었으니까.
독단이나 금제, 고독 따위가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기에 두들겨 패고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낼 참이었지만, 투왕은 의외로 순순히 그가 하는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겁을 먹어서인 듯싶기도 했지만,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궁금했던 여러 가지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먼저 확인한 것은 대환단에 대한 것이었다.
정말 투왕이 과거 대환단을 훔친 바 있는가, 또 그 대환단을 혈궁단에 직접 주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맞다. 그러나 틀리다.”
대답은 긍정, 그리고 부정이었다.
소림의 담장을 넘어 대환단을 한 알 훔쳐낸 것은 맞으나, 그가 혈궁단에 넘기며 천화에 대한 살행을 청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투왕이다.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면 뭣 하러 그딴 놈들에게 청부를 맡기겠느냐? 대환단을 취하고 직접 손을 쓰면 그만일 것을.”
만약 그럴 것이었다면 굳이 아까운 대환단을 쓸 것도 없이 자신이 직접 천화를 죽이러 움직였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대꾸가 돌아왔다.
물론 그것이 가능할 리는 없지만, 투왕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천화의 정확한 실력을 몰랐을 테니 인정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혈궁단이 가진 대환단이 그가 훔친 그것이 아닌가 하면 또 그것은 애매했다.
대환단을 훔쳐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을 써보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마교. 놈들의 소행이었지. 그 더러운 수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대환단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교? 흐음…… 정말 놈들이라면 뭐가 예뻐서 영감을 살려준 거요?”
마교의 소행.
투왕은 그것을 이야기했지만 천화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정말 마교 놈들이 그를 제압해 대환단을 빼앗은 것이라면 마기가 침습을 했든, 목숨을 빼앗겼든 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게 얻을 것이 따로 있어서였지. 내가, 또 역대 투왕들이 무림의 수많은 귀물들을 훔치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붙잡히지 않았겠느냐? 은신, 잠행, 침투에 통달했다 하나 절대의 무공을 지닌 것은 아니니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법이지. 그것을 헤쳐나갈 지혜를 겸비했기에 투왕의 이름이 이어져 올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게 뭐요?”
“바로 훔쳐낸 귀물을 소지하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보물을 한곳에 모아두지 않는 것이다. 신풍이 있으면 언제든 작은 틈만 생겨도 도주할 수 있음이니까.”
“거참, 잔대가리를 잘 굴린다는 소리를 거창하게도 하네.”
요컨대 대환단은 빼앗겼으나 놈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다른 곳에 감춰두었고, 붙잡혀 끌려가는 동안 눈치를 보다가 도망쳤다는 것이다.
허나, 그 또한 그대로 믿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이상한데. 신법에 자신이 있다 한들, 제압했을 때 내공 금제를 가하는 것은 기본이 아닌가?”
무림인을 제압했을 때, 내공 금제를 가해 보법과 신법을 비롯한 어떤 무공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기본이니까.
설마하니 마교 놈들이 그런 기본을 잊었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때문에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꼬나보았으나, 투왕은 이번에도 당당히 대꾸했다.
“흐흐흐. 내게 점혈 따위를 푸는 기예도 없을 것 같으냐? 다 비법이 있지!”
“흠? 못 풀던데.”
“크흠! 네놈의 것은 좀 이상하긴 하더구나. 내가 묻고 싶다. 대체 어떤 점혈법을 쓴 게지?”
점혈을 풀어내는 투왕만의 비법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요상하게도 천화의 점혈만큼은 풀리지 않았기에 억울한 듯 역으로 물음을 던지기는 했다.
물론 점혈을 풀어낸다 한들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자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대충 그렇다 칩시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놈들이 진짜 원하던 물건이란 건 뭐요?”
“그건…… 직접 확인해봐라. 도착했으니.”
그것은 천화도 알고 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설혹 투왕이 마교와 결탁했고, 마공 따위를 써서 자신을 암습한다 해도 충분히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놈들의 목적이었기에 다시 묻자 투왕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야를 현혹시키고, 모습을 감추어내는 진법이 깔려있는 탓이다.
“따라와라.”
천화는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고, 직접 진법을 깨부술까 생각했으나 투왕이 앞서가며 진법의 생문을 열었기에 굳이 손을 쓰진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자신을 진법에 빠뜨리려는 수작일 수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어중간한 진법 따위는 걸음 한 번에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슬슬 알게 되었을 테니까.
“중원에 도합 서른여섯 개의 안가가 있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그중 열 한 개의 안가가 누군가에 의해 발각되었지. 아무래도 놈들과 마찰이 있고 나서, 나에 대해 무던히 조사하고 연구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선객이 있었을 수 있다?”
“아니. 그건 아닐게다. 안가 중 일부가 발각된 이후 이 근처에는 아예 발길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또, 장소가 장소이지 않느냐? 아무리 마교 놈들이라 해도 여기에는 닿지 못했을 거다.”
이어 투왕이 푸념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기에, 천화는 혹시 그가 비어 버린 안가 한 곳을 대충 데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으나 투왕이 금방 부정했다.
그의 말처럼 안가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주지 않기도 했지만, 이곳의 위치가 가지는 특성을 언급한 것이다.
소림의 앞마당.
그렇게도 부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래봤자 숭산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에 불과했고, 소림 승려들이 자주 오가는 곳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소림이다.
마공을 익힌 마교도들의 입장에서는 근처에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크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곳이자 다른 무림인들 역시 정과 사를 막론하고 소림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쉽게 접근하거나 행사를 벌이지 못하는 곳이었으니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간단한 현혹진조차 아직 건재하게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했고 말이다.
“에게?”
그렇게, 몇 걸음을 더 걷자 진법의 기운이 걷히며 낡은 초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투왕의 거처라고 보기에도 볼품없지만, 그의 보물이 쌓인 곳이라기에도 다소 협소한 모습이었기에 천화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흘흘. 그렇게 볼 것 없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초옥은 눈속임일 뿐,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오호?”
투웅
이어진 설명에 천화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진동을 통해 내부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안에 그득하게 쌓인 무언가의 존재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또한 속임수일 뿐이지. 이쪽이다.”
허나, 그 또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 안에 쌓인 재화들은 진짜겠지만 투왕이 쌓아놓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닌 것이다.
천화가 속은 것에 만족했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은 투왕이 초옥을 지나쳤다. 그 너머로 쭉 지나치는가 싶더니 반대편 진법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러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러자 그를 마중하는 놈이 있었다.
“끼낏!”
영물 담비.
길쭉한 몸과 사나운 기질을 가진 족제비 같은 놈이 투왕에게 다가와 살갑게 몸을 부볐다.
그러곤 천화를 인식하며 사납게 몸을 떨었다.
털을 쭈뼛하게 세우며 경계하고 적의를 드러냈다.
“조심하게. 이래 봬도 성미가 꽤나 대단한 녀석이거든. 어지간한 절정 고수도……?”
그 모습을 든든하게 지켜보며 천화에게 으스대듯 이야기하던 투왕의 표정이 멍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끼힝…….”
천화와 눈을 마주친 녀석이 대번에 배를 벌렁 까뒤집고 필사적으로 아양을 떨어댔기 때문이다.
천화가 가진 기운도 기운이지만, 그에게 묻은 무오와 뇌령의 체취 때문이었다.
영물은 본능적으로 더 강한 영물을 알아보니까.
적의가 공포와 생존 본능으로 이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크, 크흠. 이 녀석이 사람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보군. 아무튼 이쪽으로 오게!”
그 광경에 무안해졌는지 투왕이 애써 무시하며 천화를 다시 안내했다.
녀석이 기어 나온 작은 굴 같은 곳으로 천화를 데려갔다.
“이 안에 내 진짜 안가가 있네.”
그곳은 어린아이나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굴이었다.
성인은, 당장 비쩍 마른 투왕조차도 쉽게 들어갈 수 없어 보였기에 어쩌라는 것인가 하고 쳐다보자 투왕이 시험을 보이듯 먼저 그곳에 몸을 밀어 넣었다.
스륵- 스르르륵-
그러자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좁은 굴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갔다.
유가 축근공 따위를 사용한 것처럼 몸이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액체가 된 것마냥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
이걸 지금 따라 들어오라는 건가?
아니면 쫓아오지 못하게 하고 도망이라도 칠 작정인가?
그 모습을 천화가 황당하게 바라보다가 발 뒤꿈치를 통통 두드렸다.
음파와 진동을 이용해 내부의 구조와 위치를 살핀 뒤, 그가 사라진 굴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면 진법을 벗어나야 했지만, 무상보의 묘리로 걷자 진법의 효과쯤은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쯤인가?”
그렇게 어딘가에 도착한 천화가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보다가, 다시 한번 크게 발을 굴렀다.
천음신공
격타음
대지분쇄
쿠구구구구궁!!
그와 함께 주변의 땅이 밀려났다.
땅거죽이 뒤집히며 오랜 세월 감춰왔던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흐흐흐.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으힉?!”
“여깁니까? 흠, 생각보단 좀 좁네.”
그렇게 수직으로 땅을 파고 내려간 천화가 마침 도착한 투왕과 마주쳤다.
노망난 것처럼 시시덕거리며 혼자 중얼대고 있는 모습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안가라는 동혈 내부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좁다.
중원 전역에 서른여섯 개의 안가를 설치해두었다더니 이곳은 작은 편인지, 혹은 부피가 작은놈들만 모아놓은 곳인지 투왕이라는 이름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크기였다.
하지만 그 안에 놓인 물건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들이라는 건 알겠다.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비급이요, 다른 하나는 보물이라 부를 수 있는 진귀한 물건들이었다.
금자, 은자, 전표 따위나 영약은 없었다.
짧은 감상처럼 부피가 나가는 물건들보다 가치가 높은 놈들을 주로 모아놓은 듯싶었는데, 영약이 없는 것은 의외였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간단히 해소되었다.
“영약? 그런 게 있으면 당장 먹어야지 썩혀서 뭐하게?”
영약의 경우는 생기는 족족 먹어치운다는 것이다.
아마 대환단도 직접 먹어치울 요량으로 훔쳐냈으나 미처 그러기 전에 마교 놈들에게 붙잡힌 모양이었다.
‘이해는 되는군.’
투왕의 무공을 생각하면, 신법만 특출날 뿐 다른 무공적인 부분이 천화의 기준에서 꽤나 부족해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부족한 부분을 내공으로 메운 것이겠지.
자신의 무공도 높여야 하고, 차후 제자의 내공도 챙겨줘야 할 테니 영약을 훔쳐 보관할 새가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사실 천화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다른 것들에 시선을 옮겼고, 그것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흐흐. 어떠냐. 아주 기똥차지? 이게 중원 오왕 중 하나, 투왕의 수집품이다.”
“……왜 그렇게 욕을 처먹는지는 알겠네. 왜 쌓아두기만 하는지도 알겠고.”
그것은 바로 특징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물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급 또한 천화 조차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본 것들이다.
유명 문파의 절기들.
그렇기에 어디로 유출할 수도, 팔아치울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판매자도, 구매자도 쫓기게 될 테니까.
이 중 몇 개만 동시에 내놓아도 그자는 무림공적 쯤으로 찍혀 도망자 신세를 살게 될 것이 뻔한 것들이었기에 아마 투왕도 팔아치우지 못하고 묵혀두기만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투왕은 대체 왜, 무슨 이유도 이것들을 모은 것일까?
자신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을 높이기 위해?
쉽게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닌 듯싶었다.
그가 여기 있는 무공들은 익힌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만약 그 무공을 펼치기라도 했다가는 투왕의 지위를 박탈당할 판이니까.
묘리만 취했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강해야 할 테고, 과연 그것을 행할 만큼 투왕의 무공에 깊이가 있는지도 의문이니까.
“그럼 대체 이것들은 왜 훔친 거요? 써먹지도 못할 것들을.”
“그야…….”
천화가 그것에 대해 묻자 투왕이 답지 않게 눈빛을 빛냈다.
어떤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경청의 자세로 듣는 천화에게 그가 아주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그냥?”
“……?”
“쭉 전시해놓고 바라보면 뿌듯하니까?”
“이 미친 영감탱이가.”
그 황당한 대답에 천화조차 고개를 저었다.
어째 이 무림이란 동네에는 자신 빼고 정상이 없는지 모르겠다.
“가만, 이건 또 뭐야?”
“그, 그건……!”
이어 천천히 안을 살피던 천화의 눈에 좀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여인의 속곳이다.
좋은 비단을 썼고, 그 형태로 무척이나 화려한 것이 평범한 이의 속곳은 아닌 듯싶지만 대체 이게 여기에 왜 있는지 의아했기에 묻자 투왕도 짐짓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흠흠. 황후의 속곳이다.”
“황후? 내가 알기론 당금 황후의 나이가 벌써 70이 넘었을 텐데? 그런 취향이었수?”
“아, 아니얏!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황궁의 담을 넘었다는 증표로서…… 그리고 당시에는 약관을 갓 넘은 꽃다운 나이였단 말이다!”
“예예. 그러시겠죠. 근데, 그런 것치고는 꽤 늘어났는데 입어보기라도 하셨나…….”
“닥쳐랏! 이거나 받아!”
휘익-
이어진 천화의 질문 공세에 허둥대던 투왕이 무언가를 집어 천화에게 던졌다.
종이에 싸인 손바닥만 한 무언가.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상으로는 조각상 따위인 듯싶었다.
“이건…….”
또한, 싸맨 종이도 평범치 않아 보인다.
단순한 포장용지가 아니라 탁본처럼 보였다.
덕분에 천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난기가 싹 가실 수밖에 없는 물건이니까.
이미 비슷한 것을 보았고, 또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게 놈들이 노리던 물건이다.”
그것이, 마교 놈들이 찾던 물건이었다.